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8월 쿠데타 (문단 편집) === 옐친의 부상과 고르바초프의 실각 === 권좌를 되찾은 고르바초프와 옐친은 즉각 공산당에 대한 대숙청에 들어갔다. 8명의 주요 쿠데타 인물 중 내무장관 푸고는 자살했고 나머지 일곱명은 체포된 상태였다. 고르바초프가 복귀 이후에 두문불출하던 사이, 숙청을 선두지휘한 것은 옐친이었다. 옐친은 군의 공산당 조직을 모두 해체하고 공산당 세포조직을 모두 체포할 것을 명령했다. 전국 각지에서 수십만명의 시민들이 고르바초프의 귀환을 환영하는 집회를 가졌다. 옐친은 고르바초프에게 연정을 제안할 정도로 정치적 입지가 확대되어 있었다. 옐친은 국회의사당에서 호기로운 연설을 했다. >지난 사흘 동안 우리가 추진해 온 소련의 개혁정책이 결코 반전될 수 없는 것임을 보았습니다. 아직도 소련에는 역사의 시계를 멈추고 되돌리려 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또한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역사로부터 배워야 할 교훈인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국민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보았습니다. 개혁과 개방을 향한 소련의 정치적 진로와 지도자들 맨손밖에 없는 국민이 지켜냈습니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우리의 시민들이 소련 헌법과 헌정을 지켜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미래의 개혁을 담보하는 가장 확고한 보장이라고 믿습니다. 지난 사흘 동안 암흑의 시대를 겪으며 우리는 몇 가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 >우리의 개혁정책은 아직도 그 뿌리가 취약하며 연방제도는 지극히 보수적인 성격의 것임이 드러났습니다. 아직도 소련 사이에는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주의가 팽배해 있습니다. 소련 사회구조 전체가 달라져야 합니다. 이제 더 이상 개혁은 미룰 수 없음이 이번에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사회 구조전체가 바꿔야만 합니다. > >우리의 사회는 보다 융통성 있고 보다 합리적인 것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또한 각 공화국의 권익이 지켜질 수 있느냐 이를 위해서 우선 연방조약이 마련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번 사태로 연방조약에 조인이 늦어지고 있습니다마는 이것도 더 이상 지연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아울러 이미 합의된 연방조약의 내용이 연방국의 권리를 지키기에는 너무 미흡하다는 것이 드러났으므로 이 점도 보다 강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 >앞으로 조인될 연방조약에는 지난 사흘 동안 우리가 겪었던 쓰라린 체험이 반영돼야 할 것입니다. 소련이 그 자신을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내부적 위험에 대처할 수 있는 안전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리츠코이프 부통령이 지금의 여러분에게 이점에 대해서 보다 상세하게 말씀드릴 것입니다. 또한 러시아 공화국의 경제계획에 대해서도 루츠코이 부통령이 말씀드릴 것입니다. 한마디로 러시아 공화국의 경제는 환골탈태의 변화의 겪어야만 합니다. 끝으로 언론의 자유가 신장되어야 할 것입니다. > >지난 사흘 동안 우리는 언론 통제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생생하게 겪었습니다. 바로 비상대책위원회가 이 점을 어떻게 악용하는가를 우리가 생생하게 보아왔습니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법령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나는 앞으로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긴밀하게 협력해 나갈 것을 다짐합니다. > >이 자리를 빌어서 앞으로 우리는 연방정부와 긴밀한 협력 하에서 연방과 공화국의 단계 등 필요한 모든 개혁조치를 추진해 갈 것임을 밝힙니다. 러시아공화국과 모스크바 시민들이 평온을 암흑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냈습니다. > >우리는 이 같은 업적을 자랑해야 할 것입니다. > >지난 사흘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 의사당의 수고를 위해 분투해 오신 여러분에게 치하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특히 고르비아체 대령과 콘스탄틴 리바노비치 장군의 공이 더욱 빛납니다. 이 자리에서 많은 의원들과 공무원들이 서류를 들고 다니던 손에 기관총을 들고 지난 사흘 동안 싸워 왔습니다. > >그리고 러시아 공화국을 대표해서 군부와 맨손에서 영웅적인 투쟁을 해 온 모스크바 시민들에게 감사와 치하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들의 희생과 노력이 오늘의 승리를 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 연설이 끝난 이후 러시아 국회의사당에서 소련 국기가 내려가고 러시아 국기가 게양되었다. 쿠데타는 진압되었지만 이 사건은 소련 보수파들이 [[페레스트로이카]]와 소련의 붕괴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를 미리 보여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비록 이번 사태로 인해 보수파들의 정치적 입지가 사라져버렸지만 고르바초프와 옐친은 이들을 확실히 짓밟기 시작했다. '''이번 사태의 최고 수혜자는 당연히 옐친이었다.''' 미국의 국가안보보좌관 [[즈비그니에프 브레진스키]]는 옐친을 역사와 운명의 사람으로 극찬하며 앞으로 고르바초프가 옐친에게 끌려다닐 것으로 예측했는데 나중에 소련 해체의 과정을 보면 틀린 말도 아니었다. 이미 고르바초프는 옐친에게 권력의 반은 넘겨줘야 할 것이라고 예측되었고, 결국 그 해가 가기 전에 소련이 망해 그나마 반도 지키지 못했다. 미국과 일본은 일제히 옐친에 대한 찬사를 보냈고 미국 언론들은 옐친을 영웅으로, 그리고 앞으로 돈독해질 미소 관계의 주역으로 떠올렸다. 서방의 중단된 원조도 일제히 재개되었다. 고르바초프는 [[러시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을 비롯한 9개 공화국 지도자들과 만나 신연방조약 조인 문제 등을 논의하면서 대통령으로서의 직무를 재개했지만 이미 그는 완전히 실각한 거나 다름없었다. 공화국의 지도자들은 대대적인 자치를 요구했고 발트 3국과 [[몰도바]] 등 6개 공화국은 아예 독립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번 쿠데타로 야기된 거대한 역사의 물결은 고르바초프의 반대파들을 쓸어갔지만 고르바초프 본인도 쓸어 버렸다. '''연방을 유지해야 할 소련의 주요 인물들은 이 쿠데타로 완전히 실각한 후였다'''. 고르바초프가 자신의 측근으로 믿었던 인물들까지 대거 쿠데타에 동참하면서 고르바초프 본인이 '''"실망했다."''' 는 발언을 할 정도였다. --친구들이 다 배신을 했으니-- 쿠데타에 적극 앞장섰던 KGB는 이미 시민들에게 조리돌림을 당하고 있었다. 시민들은 경찰들이 구경만 하는 동안 KGB 청사로 몰려가 KGB 창시자 [[펠릭스 제르진스키]] 동상을 박살내고 러시아 국기를 게양했다. 본부의 푯말엔 철십자가 그려졌다. "니들이 [[나치]]와 다를 게 뭐냐"는 의도로 행해진 것이다. KGB 요원들은 건물 안에 숨어서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쿠데타가 벌어지는 동안 편을 정하지 못했던 외무장관 베스메르티니크는 기회주의자로 몰려 비난을 당하다가 결국 사임했다. 셰바르드나제는 고르바초프도 사실 쿠데타 세력과 한패였던 것이 아니냐고 고르바초프를 공격했고 고르바초프는 거의 대응도 못했다. 길거리에선 공산당 간부들이 시민들에게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하는 판이었다. 주요 기관에선 옐친의 올라간 권위를 상징하듯이 소련기와 러시아 공화국 깃발이 동시에 나부꼈다. 옐친은 공식적으로 소련의 권력의 절반을 고르바초프로부터 넘겨받았고 연립정부를 수립할 막강한 권력을 가지게 되었고 고르바초프의 직무 수행이 불가능해질 경우 대통령 권한대행을 부여받기로 되었다. 만약 옐친이 직무 수행이 불가능할 시에는 고르바초프가 옐친의 업무도 맡는 형식이었지만 뭐 '''연방 소속 공화국의 대통령과 연방 대통령이 맞먹는''' 상황에서 누가 맛간 건지를 보면... 소련의 내각은 빠르게 옐친의 사람들로 채워졌다. KGB 의장과 내무국방관에 가빈다카빈 전 내무장관과 예프게니 샤포슈니코프 공군참모총장이 임명되었고 러시아 공화국 내무장관엔 빅토르 바라니코프가 임명되었는데 모두가 옐친의 지지자 또는 핵심 측근들이었다. 사실 이 자리엔 고르바초프가 자신의 사람들을 임명해 놨는데 옐친의 항의로 도로 다 물려야 했다. 공화국 회의에 나온 소련 서기장 고르바초프에게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이였던 옐친은 무려 서기장에게 '''삿대질을 하며''' "어서 명단을 읽으시오."라고 큰소리를 치며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었다. 옐친의 공산당의 잔여 세력에 대한 숙청도 철저했다. 옐친은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와 소련 텔레비전 라디오 위원회를 비롯한 '''친공산당 언론을 쿠데타 세력으로 몰아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프라우다를 비롯하여 소베츠카루시아, 글라스노스트, 라보티아트리 분아, 모스코프스프라우다, 스나미아 등 6개 일간 신문이 정간되었으며 소련 텔레비전 라디오의 메인뉴스 프로그램인 [[브례먀]]도 전면적으로 폐지되었으며[* 원채 친 고르바초프적인 논조를 띄었으나 보수파 쿠데타 와중에 보수파에 우호적인 논조를 보인 게 문제가 되어 폐지되었다. 이후 소련 텔레비전 라디오 위원회가 개편 과정을 거쳤고, 이후에 소련 해체로 공중분해되어 수십여개 방송사로 쪼개졌다. 한편 브례먀는 1994년 12월에 부활하게 된다. 물론 친 옐친적 논조를 띄게 된 건 덤.] [[타스]]와 [[노보스티]] 두 통신사의 사장은 유언비어 유포죄로 전격 해임되고 국유화되었다. 남은 것은 [[이즈베스티야]]와 [[트루드]], [[크라스나야 즈베즈다]] 등 3개 신문뿐이었다. 한편 옐친이 임명한 샤포슈니코프 국방장관은 대대적인 숙군 사업을 실시하여 군 고급 장교의 80%를 숙청했다. 그리고 8월 25일 일요일 마침내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브례먀 텔레비전을 통해 '''공산당 [[서기장]] 사임을 선언했고 정치국, 서기국, 당중앙위원회가 쿠데타를 막지 못해 쓸모가 없었다면서 공산당 중앙위원회를 해체했다.''' 군, 국가기관 내부에서 공산당 활동이 금지됐으며 공산당 자산도 모두 압류되었다. [[발트 3국]]과 [[몰도바]]의 독립도 승인됐다. 고르바초프는 내각의 신임안 여부를 표결에 부쳤고 소련의 해체는 사실상 확정되고 말았다. 이에 시민들은 길거리로 쏟아져나와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1991년 8월 29일''' 밤, 소련 최고 입법기구인 연방최고회의는 '''공산당 활동을 소련 전역에서 정지시키는 내용'''의 결의안을 표결에 상정해 찬성 283 반대 29 기권 52표의 압도적 표차로 승인했다. 이유는 공산당 조직들이 쿠데타에 연루되었기 때문이었다. 고르바초프는 비상 대권을 박탈당했고 고르바초프의 지기이자 연방최고회의 의장 루키아노프는 면책 특권을 박탈당하고 쿠데타 동조 혐의로 체포되었다.[* 옐친은 1년전인 1990년 소련 공산당이 개혁개방에 커다란 걸림돌과 방해가 된다고 당 대회에서 대놓고 비난을 퍼부은 후 자발적으로 공산당을 탈당한 전력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